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아래 두 기록은 시조 영의공께서 처음 발을 디딘 축산포의 유적이 표식도 없이 잊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후손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이에 후손들이 직접 현지를 답사하여 통사동, 김이부동, 망제단 등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지명과 옛 터를 고증하며 시조의 자취가 실재함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시조의 성스러운 유적을 기리고자 유적을 복원하고 비석 건립의 뜻을 모으고, 경향 각지의 모든 종인이 한마음으로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이다.
경향각지의 종중에 보내는 통문 (通京鄉宗中文)
후손 생원 대만 지음
삼가 시조 영의공은 당나라의 전대지신으로 일본해역을 항해하시다가 폭풍으로 유린 축산섬에 표박하여 남씨로 득성한 시조가 되시니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시조께서 동국에 오신지가 어언 천여 년이 되었다.
족보와 가첩에 기록하니 온나라 시조공의 후예가 되는 이는 누구인들 입으로 암송하고 귀에 익숙한 말이 아니겠는가.
소위 유린 땅은 우리 고장의 신라 때의 옛 이름이다. 세대는 바뀌어지나 산천은 불변하여 포구의 사람들이 옛일을 전설로 전하여 구비가 되었으니 이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로세.
대저 선비들이 옛 선인들의 학문과 도덕을 닦던 곳이라도 상상하고 배회하며 그 법도를 본받고 끼친 덕망을 지키고자 하거늘 하물며 선조께서 사시던 곳이랴.
우리 시조공께서 일엽편주로 만경창파를 헤치고 구사일생으로 닿은 곳에 남긴 자취가 유허임을 행인들도 가르키거늘 수많은 후손들이 한사람도 찾는 이가 없는 것은 그곳에 표지가 없기 때문이다. 먼 곳에 거주하는 자손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까이 본 읍에 사는 자손들은 더욱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파가 이곳에 입향한지도 수백 년이 되었는데 우리 선인들께서 뜻은 있으되 이루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더니 지난 경진년 겨울에 종인 몇 사람을 가려서 축산포로 보내어 그 곳에서 머물면서 고증하여 오게 하니 대저 축산포는 신라로부터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변화한 명승지였다.
천류는 흘러 바다에 이르고 굽이 돌아서 호수를 이루고 일점 죽도는 하늘높이 솟았는데 포구에 들어오면 통사동이 있으며 통사로부터 남쪽으로 이어진 십여 자취에 김이부동이 있으니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면하여 고요하고 안존하며 깊숙하여 진실로 대인이 살만한 곳이나 지금은 모래와 자갈밭으로 변해 버렸고 죽도 남쪽 굽이에는 천년 고단이 돌을 쌓아 삼층으로 쌓았는데 예부터 전하기를 김이부가 고향을 바라보던 곳이라 하고 섬의 남북에는 또한 망제 망일 망월의 세대가 바다를 돌아 절벽에 맞닿았으니 이곳도 우리 조상이 이름을 붙인 곳이라 한다.
아, 지난일은 아득한데 물은 흐르고 구름만 오가는데 기지와 단선은 다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하여져 의심이 의심으로 전하여 질 뿐이나 우리 조상님의 표박한 곳이 이곳에 있고 육지에 오른 곳이 이곳이니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 대저 신라의 임금이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 천자에게 공이 살고 싶은 곳에서 살도록 허락받는 기간이 몇 년이 지났을 것인 즉 사성을 받고 식읍을 봉하기 전에 이곳 축산포의 그윽한 곳에 땅을 가려 살았던 것은 당연지사로 비를 세워 그곳을 표시하여 자손들의 추모하는 마음을 달래고 포구 사람들의 구전에 보답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으리요.
이에 본 읍에 사는 여러 종인들과 상의하여 호수를 헤아려 경비를 염출하여 비를 세우는 비용으로 쓰고저 먼저 근처부터 시행하고 또한 전국 각처의 종중에 통문을 보내오니 여러 종인들 께서는 어떠하올런지요. 아마 추천하고 조상을 섬기는 뜻에는 다름이 없을 것인 즉 바라건 데 한마음 한 뜻으로 정성을 다하여 명전을 거두어 보내 주시고 조상의 유지를 빛내고 옛 유적을 드러나게 하여 백성들의 덕성이 두텁게 하는 것 또한 우리 종중의 큰 행운일 것이니 삼가 살피옵기를 바랍니다.
죽포의 근원을 상고해 기록한 글 (竹浦溯源錄)
후손 경열 기
축산은 우리 비조이신 영의공께서 배를 타고와 정박하신 곳이다. 천 년 이전의 지난 발자취는 징험할만한 문헌자료가 없었다. 포구에 사는 노인들이 전하는 말로는 통사동, 김이부동, 망향대, 망제단, 일광대, 월영대 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를 듣고서 감흥이 일어나,
“대개 군자가 살터를 잡더라도 다섯 대가 내려가면 끊어진다고 하는데, 우리 선조께서 선택하신 곳은 천세가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았다.”라 하였다.
가첩을 살펴보니, "비조이신 영의공께서는 저 중국의 여남지방 사람으로 본성은 김씨이고 휘는 충이신데, 당나라 천보14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가시던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땅인 축산포에 정박하였다.”라 한다. 유린은 바로 영해의 옛 지명이다.
아아! 우리나라의 남씨는 축산에서 시작되었으니 중국 농서(西)의 이씨와 중국 미산의 소씨만 그러할 뿐이겠는가.
지금 포구 백성들이 예전부터 전해 들었던 우리 시조께서 축산도에 들어오시게 된 연유는 가전 보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통사동과 김이부동이라는 지명은 우리 비조께서 일본에 통사로 가실 때의 관직이 이부상서였고 표류해 이 마을에 사셨기에 포구 백성들이 그 직함으로 마을 이름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선조께서 영양을 식읍으로 받았기 때문에 포구 백성들이 그 터를 통사동과 김이부동이라 한 것이다. 통사와 이부는 같은 마을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 비조께서 상륙할 당시 처음에는 통사동에 거주하셨고 뒤에 이부동에 거처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망제단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 비조께서 만 리나 떨어진 타국에 사시면서 멀리 부모의 묘소라도 바라보고자 산에 올라 대를 쌓고 고향을 생각하며 제를 올린 곳이다. 또한 이른바 일광과 월영대라고 이름 지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비조께서 남쪽 바다 가에서 습한 바람을 맞고 외롭게 지내시며 무료할 때마다 배를 타고 두 누대 사이를 오가시며 나그네의 시름을 푸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황혼에 옥처럼 둥근 달이 밝게 빛나는 광경을 바라보고 도리어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찌천년 뒤에까지 포구 노인들과 무지한 시골 백성들이 구전할 수 있었겠는가?
이 해 겨울 영해에 사는 자손들이 처음으로 비를 세우려는 논의를 하였으나 추위로 길이 막혀 그 유허를 가서 볼 수 없었다. 12월 12일에 이르러 문중 어른들의 명을 받들고 그 옛 유적을 찾아나서자 날씨가 따뜻해져 마치 봄날과 다름없었다.
나와 첨언씨 및 아우인 천칙은 말을 타기도 하고 더러는 걸어서 해질 무렵에서야 비로소 축산포에 당도하였다. 축산포 가에는 만호 고성이 있고 성 뒤가 바로 통사동이었다. 그 곳 백성들이 일구고 있는 전지들이 얼마쯤 되었다.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사방이 둥그런 성마을은 앞이 가려져서 바닷물은 보이지 않았는데 참으로 살만한 곳이었다. 그래서 통사동의 민가에서 말 먹이를 주고서 곧장 축산도로 올라갔다. 그곳에 가서 보니 과연 망제단과 망향대가 남아 있었다. 대의 남쪽과 북쪽으로는 총총한 대나무들이 빼곡히 자라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겨우 나무를 헤치고 가시 넝쿨을 뚫고서 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는 네 층의 층계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상하 두 층계는 돌을 쌓은 것이 십여 개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의 두층에는 비스듬하게 돌을 쌓았는데 지금까지 완연한 모습이다.
또 무덤처럼 생기고 조금 큰 언덕과 같은 것은 두번째 층계 부근에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김이부가 이곳에 머물렀던 옛 터전이라 했다.
일광대는 섬 북쪽 산록에 있는데 바닷가에 높다랗고 조금 길쭉한 형태인데 그 가운데 반 길 정도의 반석이 있어서 5,6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녁에서야 성 마을에 사는 김초관의 집에서 묵었다. 밤중에 촌로들에게 또다시 옛 사적에 대해 물었다.
다음날 동쪽으로 가서 월영대를 구경했다. 월영대는 성에서 5,6보 정도 떨어져 있는데 포성의 주산 산맥이 끝나는 곳이었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월영대는 호수가 마치 쟁반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일광대와 비교해 보아도 더 나았다.
이부동은 통사동 서쪽으로 약 천여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 곳은 곡구로 들어선 곳에다 이름 붙여 이부동이라 한다. 봉산 남록이 구불구불 내려와 한 줄기가 다시 열려 주산이 되었는데 그 앞쪽으로는 작은 시내가 흐른다. 봉산 남쪽 골로부터 그 아래쪽으로는 천 길 석벽이 열려 있는데 그곳에는 물이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겨울이 되면 그곳은 얼음이 얼어 얼음조각들이 흩뿌려진다. 이것이 마을 안의 풍광이다. 그 가장 남쪽으로는 긴 시냇물이 흐르는데 마치 커다란 활 모양이다.
또 그 남쪽은 마산인데, 그 모양이 마치 말을 탄 병사가 깃발을 들고 달려오는 형국으로 마을의 안산이다. 안산이 끝나는 곳에 또 다른 대의 옛 터가 있는데 그 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한다.
죽도 양편의 해수는 그 왼편으로 모래가 쌓여 포구 마을이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그윽한 형국으로 인해 이곳이 숨어서 살만한 공간이 된다. 돌아오는 길에 노송과 그 아래로 펼쳐진 밭들을 보았는데, 모양이 둥글면서도 넓어서 그 정취가 보기에 시원할 정도였다.
죽도는 두 개의 독산이 바로 보이는 곳에 서 있는데 그 앞쪽으로는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어서 참으로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경치는 이부동보다는 못하였다. 또 그 남쪽으로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 있는데 자갈이 가득한 밭이 있다. 그곳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은 이곳이 옛 마을 터전이라 했다. 죽산 한 지역은 대개 그 폭이 10리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바닷가의 명승에 자리 잡고 있다.
봉산이 그 북쪽에 있고 대해가 그 동쪽에 있으며 마산이 그 남쪽에, 그리고 큰 시냇물이 그 서쪽으로 흘러가며 조그마한 죽도가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으로 있다. 그리고 양쪽으로 호수가 거울처럼 맑게 펼쳐져 있다. 어선과 상선들이 쉼 없이 오가며 고기잡이 노래를 서로 부르고 장사소리를 잇달아 흥얼거리니 이는 아침나절의 풍경들이다.
아! 이러한 자연 경관이 몇 천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곳으로 오신 뒤 로부터는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대개 선현들께서 머물러 사셨던 곳에는 반드시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낸다. 이는 그분들을 존모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죽산은 비단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 머물러 사셨던 곳일 뿐 아니라 거주하셨던 동리의 이름이 아직까지 세상에 전해지고 있고 산보하셨던 대에 남은 발자취를 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정도이니 사당을 세워 존모함은 실로 후손들의 책무인 것이다. 그러나 경향각처에 산거하고 있는 자손들의 논의를 모을 길도 없고 또 그 비용을 마련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아서 본 읍에 사는 자손들이 이에 감히 먼저 일을 시작해 빗돌을 세울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니 이 또한 그 가운데 이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내력을 적어 기문을 쓰고 뒷날 이를 보고 이러한 내력을 알게 하고자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