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석호공 영정 상상도
공(公)의 휘(諱)는 실(實), 자(字)는 신보(信甫)이며 호(號)는 석호(石湖)이다. 운강공(雲岡公)의 두 번째 정실(正室)인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에게서 1599년(선조 32, 기해) 청송에서 태어나, 청장년기를 보낸 후 만년에 대구 입석(立石)으로 이거(移居)하여 선비의 도를 지키며 후손을 위한 터전을 마련했다. 1671년(현종 12, 신해) 73세를 일기(一紀)로 생을 마감한 우리 종중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시조(始祖)는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며, 중시조(中始祖)인 중대광공(重大匡公) 홍보(洪輔)를 1세(世)로 하여 겸(謙), 숙손(淑孫), 지탁(之卓), 혁(赫), 승고(承顧)로 이어져 왔다. 중랑장(中郎將) 영번(永蕃)은 중대광공의 7세손으로, 고려의 운이 다하자 울진(蔚珍)에서 칩거하다가 세상을 하직한 후 울진 화방에 모셔졌다
석호공의 5대조는 송정공(松亭公) 수(須), 고조(高祖)는 신암공(愼庵公) 손(蓀), 증조(曾祖)는 은와공(隱窩公) 찬(鑽)), 조(祖)는 근재공(謹齋公) 억령(億齡)이며, 선고(先考)는 운강공(雲岡公)이다. 운강공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첫 번째 정실인 숙부인 성산이씨(星山李氏)는 우(佑), 수(脩), 관(寬)을 낳았고, 두 번째 정실인 숙부인 김해 김씨에게서 석호공 휘 실(實)이 태어났다. 두 딸은 장성하여 권극형(權克亨), 민계건(閔繼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강직하고 명민하여 재주가 특출하였다고 전해진다. 한 일화로, 7세 때 후원에서 놀다가 한 뿌리에서 네 개의 가지가 뻗은 나무를 보고 나무꾼에게 베지 말라고 일렀다. 운강공이 그 연유를 묻자, “네 개의 가지가 저희 형제와 같아 아끼고 보호하고자 함입니다.”라고 답하니, 이를 들은 많은 이들이 공의 지극한 형제애와 영특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장래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맏형 돈재공(遯齋公)과 교분이 두터웠던 경당(敬堂) 장 선생은, 공이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글 읽는 소리가 맑고 사람을 응대함에 예의가 발라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애정을 가지고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보았으나 막힘이 없자, "앞으로 남씨 가문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 장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장 선생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문인으로서 극진한 관심과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다.
운강공이 여든의 나이에 몸이 편찮아지자 예순의 둔재공이 수발을 들었는데, 공은 그 곁을 지키며 약 달이는 것을 돕는 등 늘 효와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친의 엄한 훈육을 독실히 받들어 늘 책을 가까이하고 법도를 중시했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익히니 문장이 뛰어나고 필력이 대단했다. 어느덧 학문이 경지에 이르자 선비와 유림에서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1618년 광해군 재위 시절,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시해 사건, 그리고 유림에 대한 박해를 보고 세상을 개탄하며 친구인 석병(石屛)과 더불어 과거에 나아가지 않기로 맹약했다. 그러던 중 162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고 여막(廬幕)에 거처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관직에 나아갈 결심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향시(鄕試)에는 세 번이나 합격했으나 예조시(禮曹試)에는 급제하지 못하여 결국 낙향했다. 공은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정자를 짓고 선비들을 모아 백록동규(白鹿洞規)를 세워 오경(五經)을 강론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세자와 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자, 공은 밤마다 향을 피우고 두 분의 무사 귀환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삼학사(三學士)의 순절 소식을 듣고는 탄식과 상심으로 나날을 보내며 매우 안타까워하는 등, 늘 나라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이 지극했다. 1659년 기해예송(己亥禮訟) 당시, 효종의 사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남인과 서인이 극한 대립을 벌이자 이에 영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으나 배척당했다. 공이 이에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단독으로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장남 두극(斗極)이 울며 간청하여 그만두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만년에 모친을 모시고 대구 해안현(解顔縣) 입석리(立石里)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공은 선산이 멀고 형제들과 떨어져 있음을 늘 안타까워하며, 매번 향화(香火)나 제수(祭需)를 보내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멀리서 오는 친척들을 늘 환대하며 정성을 다했다. 또한 재물을 늘리고 가세(家勢)를 보존하는 데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후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1671년(현종 12, 신해) 11월 7일 침실에서 돌아가니, 향년 73세였다. 단산지(丹山池) 내 임좌(壬坐)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가평 이씨(嘉平 李氏) 이란수(李蘭秀)의 딸로, 묘는 당초 선산 몽대 송림동에 간좌(艮坐)하였으나, 훗날 단산지 내 공의 분묘 옆으로 이폄(移窆)하였다. 그러나 2023년 단산지 묘역이 공공사업으로 대구시에 수용되어, 부득이 개장(改葬)하여 종중 선산인 이기세(利器世) 석호원(石湖園)에 안장하여 모시고 있다.
공은 두극(斗極), 두형(斗衡) 두 아들을 두었다. 두극의 아들은 천핵(天翮), 천우(天羽), 천한(天翰)이며, 두형의 아들은 천훈(天薰), 천태(天泰)이다.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으며, 현재는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을 구심점으로 하여 숭조돈종(崇祖敦宗)하며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鎬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