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스킵네비게이션

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입향조와 석호공파

석호공 묘갈명

개장 전 단산지 석호공묘역

석호공 갓비석

석호공묘갈명 역문
(石湖公墓碣銘譯文)

공(公)의 휘(諱)는 실(實), 자(字)는 신보(信甫), 호(號)는 석호(石湖)이며 성(姓)은 남씨(南氏)이다. 시조인 휘 민(敏)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절로 오던 중 바다에서 표류하다 영해(寧海) 축산포(北山浦)에 닿았다. 당나라 천자가 그 위태로움을 가엾게 여겨 신라에 머물기를 허락하자, 신라왕이 남씨 성을 하사하고 영양읍(英陽邑)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이로써 마침내 영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으며 시호는 영의(英毅)라 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휘 홍보(洪輔)는 벼슬이 중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簽議贊成事)에 이르렀고, 영양군(英陽郡)에 거듭 봉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휘 수(須)가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내다가,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왔다.

고조부의 휘는 손(孫)으로 절도사(節度使)를 지냈고 호는 신암(愼庵)이다. 증조부의 휘는 찬(贊)이며 호는 은와(隱窩)이고, 조부의 휘는 억령(億齡)으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호는 근재(瑾齋)이다. 근재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인 휘 윤조(胤曺)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에 맞서 싸웠고, 다음 아들인 휘 계조(繼曺)는 모부인을 모시고 난을 피해 청송 안덕(安德)에 살았다. 그는 관직이 호군(護軍)에 이르렀고 호는 운강(雲岡)이니,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공의 아버지 운강공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성산 이씨(星山李氏)인 휘 방후(邦後)의 딸과, 또 다른 정부인 김해 김씨(金海金氏)인 사인(士仁)의 딸이다.

만력(萬曆) 기해년(1599년)에 공이 태어나니, 풍채가 빼어나고 성품이 명랑하며 기상이 굳세어 호걸의 풍모를 지녀 보는 이마다 기특하게 여겼다.

일곱 살에 후원에서 놀다가 한 뿌리에서 네 가지가 뻗은 나무를 보고 나무꾼들에게 베지 못하도록 일렀다. 아버지 운강공이 그 까닭을 묻자, "나무 가지들이 서로 이어진 모습이 우리 사 형제와 같기에 아끼고 보호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맏형인 둔재공(遯齋公)이 경당 장선생(敬堂張先生)과 교유했는데, 마침 경당 선생이 길을 지나다 방문했다. 그때 공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으나, 어른을 모시고 응대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으며 글 읽는 소리 또한 맑고 또랑또랑했다. 선생은 이를 사랑스럽고 남다르게 여겨 시험 삼아 글의 뜻을 물으니 막힘없이 답했다. 선생은 사람들에게 "아무개 남씨 집안이 장차 크게 번창할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공은 마침내 선생의 문인이 되어 지극한 격려와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가 여든의 나이를 누리는 동안 혹여 편찮으면 맏형이 예순의 나이에도 손수 약을 달였는데, 공은 감히 그 일을 대신하지는 못했지만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친의 엄한 가르침을 독실히 받들어 제자백가서를 비롯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특히 사서(四書)에 전념하여 문장이 풍부하고 필력 또한 힘찼으므로, 당시 큰 선비들은 모두 공을 중히 여겼다.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니 가문이 화목했고, 옳고 그름을 함부로 말하지 않으니 시비가 저절로 가려졌다.

기유년(1609년), 나라에서 일본과 통신사를 교환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동자로서 어른들 곁에 있다가 분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왕릉을 파헤친 원수도 갚지 못하고 도리어 화친을 맺으려 하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윤 참판의 시구처럼 두 능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가지가 나지 않으리라는 말이야말로 진정한 충간의담(忠肝義膽)이다."

당시 혼탁한 조정과 어지러운 시국으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고 강화에서 동생(영창대군)을 불태워 죽이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이오리(李梧里), 이백사(李白沙), 정동계(鄭桐溪) 등 여러 선생이 모두 쫓겨나 귀양 가자, 공은 분개하여 절구 한 수를 읊었다.

1659년 기해예송 변고 당시 효종 사후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 남인과 서인이 극한 대립을 하니 이에 영남 유생들이 상소를 하였으나 배척되자, 공이 분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단독으로 상소를 만들어 올리려 하였는데 장남 두극이 울면서 간청하여 그만두었다고 전해진다.

黑雲雖蔽天 (흑운수폐천) 검은 구름이 비록 하늘을 가리나
白日必臨土 (백일필임토) 밝은 해가 반드시 땅을 비추리라.

그리고는 문을 닫고 은거하며 다시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석병 이휴운(石屛 李休運)과 더불어 뜻이 통하여 세상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주고받았다.

인조반정 후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세 차례나 향시에 합격했으나, 끝내 예조에서 주관하는 회시에는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이 또한 운명이구나." 하고 탄식하며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여러 선비들을 모아 백록동규를 세우고 오경을 강론했다.

병자년(1636년)에 오랑캐의 난(병자호란)이 일어나 성 아래에서의 맹약(삼전도의 굴욕)이 이루어지고 세자와 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자, 공은 밤마다 반드시 향을 피우고 하늘에 두 분의 무사를 빌었다.

갑신년(1644년)에 세자가 돌아왔으나 삼학사는 적지에서 순절했다. 공은 "인자하신 하늘이 이 땅을 굽어살펴 다행히 신민들에게 경사를 내리셨으나, 세 충신의 천고에 빛나는 높은 절개를 신원할 길이 없으니, 나처럼 초야에 묻힌 사람이 의를 위해 죽지 못했으니 훗날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그분들을 대하겠는가." 하며 오열해 마지않았다.

정축년(1637년)에 여헌 장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 통곡하며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졌으니, 우리 후학들은 이제 누구를 본받아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

기해년(1659년) 예송(禮訟) 논쟁으로 나라의 예법에 변고가 생기자 영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기년복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항의했으나 왕의 답변을 얻지 못했다. 이에 공은 분하고 울적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홀로 상소하여 임금에게 간절히 호소하려 했으나, 장남 두극(斗極)이 울며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신유년(162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삼 년간 시묘살이하며 슬퍼했고, 상복을 벗자마자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여막을 짓고 모든 절차를 앞선 초상 때와 똑같이 행했다.

만년에는 대구 해안면 입석리로 옮겨 살았는데, 선산이 멀고 형제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약간의 재물을 내어 이를 빌려주고 이자를 늘렸다.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한편으로는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데 보태고, 한편으로는 종족들을 도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멀리서 찾아오는 가까운 친척들을 대접하는 비용으로 삼으니 그 살림살이가 매우 조리가 있었다.

신해년(1671년) 11월 7일에 침소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일흔셋이었다. 이곳 단산지(丹山池) 내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가평 이씨(加平李氏) 난수(鸞壽)의 딸이며, 묘소는 선산(善山) 몽대(夢垈) 송림동(松林洞) 간좌(艮坐)에 있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맏이는 두극(斗極)이고 다음은 두형(斗衡)이다. 두극은 천핵(天翮), 천우(天羽), 천한(天翰)을 낳았고, 두형은 천훈(天薰), 천태(天泰)를 낳았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그 수가 많아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은 시와 예를 중시하는 가풍을 이어받아 학문에 정진했으며, 여러 스승을 찾아 박문약례(博文約禮)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겼다. 비록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나라의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회포를 늘 가슴에 품었고, 그 쌓은 경륜과 포부를 세상에 펼치지 못했다. 예로부터 사람을 평가할 때는 다만 그 뜻을 살필 뿐, 그 삶이 곤궁했는지 영화로웠는지는 논할 바가 아니었다.

돌아가신 후 유고가 여러 차례 화재를 겪어 겨우 수습한 것이 얼마 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 어찌 공의 삶과 학문의 만분의 일이라도 증명할 수 있겠는가.

8대손 홍기(洪基)가 공의 묘소에 비석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공의 행적이 담긴 글 한 통을 품고 와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했다. 이는 그의 조부인 대곤(大坤) 선생이 지은 것으로, 상세한 기술에 빠짐이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대략을 추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새긴다.

마음 가운데 받은 천명(天命) 맡은 소임 다하였으니,
선비의 곧은 의지 참으로 드높도다.
옥을 품고 구슬 감추듯 그 빛 아름다움만 드러났네.
초야에서 나라 걱정 그 누가 알아주랴.
오직 하늘이 굽어 살펴 그 덕을 갚으시고 후손을 창성케 하리.
내 그 행적 기리어 길이 그 넋을 기리노라.

병자년(丙子年) 6월,
통사랑 권지승문원부정자(通仕郎權知承文院副正字)
사량후인(沙梁后人) 최현필(崔鉉弼)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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