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스킵네비게이션

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입향조와 석호공파

석호공의 유사

석호공 유사 (石湖公 遺事)

부군(府君)의 시조는 영의공(英毅公)이시며, 휘(이름)는 민(敏)이십니다. 당나라 여남(汝南) 사람으로,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영해 축산포에 정박하였는데, 때는 신라 경덕왕 때였습니다. 영양을 본관으로 삼은 남씨 1세조 홍보(洪輔)는 고려 시대에 중대광도첨의찬성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내셨고,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지셨습니다.

부군의 5대조이신 송정공(松亭公) 휘 수(須)께서는 조선 태종 정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감찰어사와 용담현령을 지내셨으며 단종조의 유신(遺臣)이셨습니다. 고조부이신 신암공(愼庵公) 휘 손(蓀)께서는 세조 정묘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진주 병마절도사와 군위현감을 지내셨습니다. 증조부이신 은와공(隱窩公) 휘 찬(鑽)께서는 내금위 부사과를 지내셨고, 조부이신 근재공(謹齋公) 휘 억령(億齡)께서는 참봉을 지내셨으며, 아버님이신 운강공(雲岡公) 휘 계조(繼曺)께서는 임진왜란 때 부호군으로 활동하셨고, 통정대부 호군으로 품계가 오르셨습니다.

부군의 호는 석호(石湖), 휘는 실(實)이시며, 선조 32년 기해년(1599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풍채가 수려하고 기질이 호방하셨으며, 맏형이신 돈재공(遯齋公)과 교분이 돈독했던 경당(敬堂)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셨습니다. 9세 때 장현광 선생이 방문하여 보시니,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고 글 읽는 소리가 맑은 물 흐르듯 청아하여 선생께서 특히 아껴 시험 삼아 물으시는 것마다 막힘없이 답하시니, "앞으로 집안의 큰 경사가 될 인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가정의 엄한 가르침 아래 사서육경과 제자백가 서적 탐독에 열중하시어 문장이 깊고 풍부하였으며, 필력이 힘차고 뛰어나 유림의 선비들도 중히 여겼습니다.

을유년(원문에는 己酉年으로 병기)에 일본 사신이 다시 국교를 청해오자, "임진왜란 때 왕릉을 파헤친 원수와 화친하는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한 가지에 살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며 이를 반대하셨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변란(계축옥사)이 일어나, 오리 이원익 선생, 백사 이항복 선생, 동계 정온 선생 등 여러 선생들께서 사사(賜死)되거나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개탄하시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으셨습니다. "검은 구름이 비록 하늘을 가리나, 밝은 해는 반드시 땅에 비추리라 (黑雲雖蔽天 白日必臨土)." 이 시를 통해 정변의 무상함을 한탄하셨습니다.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이석병공(李石屛公, 이시발(李時發)로 추정)과 함께 더 이상 과거에 나아가지 않기로 맹세하셨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시자, 밤마다 서쪽(심양 방향)을 향해 향을 피우고 축문을 읽으며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셨습니다.

정축년(1637년)에 아버님과 교분이 두터웠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의 부고를 접하고 크게 슬퍼하시며, "당론은 갈리고 세도가 바뀌니,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는 듯하도다!"라고 탄식하며 후학으로서 깊은 애도를 표하셨습니다.

기해년(1659년) 효종께서 승하하시자, 조정에서 대왕대비(장의왕후 조씨)의 상복을 기년(1년)으로 정하는 예송(禮訟) 논쟁이 일었을 때, 부군께서는 홀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것이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습니다.

신유년(1621년)에 아버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다하셨습니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자 청송 안덕에서 대구 입석(立石)으로 거처를 옮겨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시면서도 조상 섬기는 일에 소홀함이 없으셨으니, 이로써 대구 입석동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셨습니다.

부인은 가평 이씨로, 정숙하고 덕이 두터우셨으며, 신해년(1671년) 12월 7일에 향년 7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묘소는 대구 봉무동 단산(丹山) 임좌(壬坐)에 모셨습니다. 슬하에 아들 두극(斗極)과 두형(斗衡)을 두셨고, 손자는 다섯 분을 두셨으며, 증손 이하는 생략합니다.

후손 가운데 증손인 용암공(龍菴公) 휘 명신(命新)은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며, 현손인 예연공(禮淵公) 휘 석로(碩老)는 영조 계유년(175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주부, 좌랑, 춘추관 기사관, 만경현령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8세손 연서공(連墅公) 휘 이구(履龜)는 철종 때 대구 향교의 도유사(都有司, 향교의 대표)를 지냈고, 연서공의 아우인 연와공(連窩公) 휘 이간(履幹) 또한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본래 살던 터전이 비행장 부지로 징발되고 석호정(石湖亭)은 유실되었으나, 석호공의 후손 4백여 호는 대구와 경산 지역을 비롯한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화목하고 근검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이는 다 조상님의 음덕이라 하겠습니다.

석호공 탄신 400주년 기념
1999년 후손 종환(鐘煥) 삼가 쓰다.

※ 어려운 한자와 낯 설은 한글 표현과 맞춤법 등을 현재의 문어체로 풀이하여 재작성 하였습니다.
【鎬三】

석호공 400주년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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