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상현사는 광무 병인년(1896년) 가을, 화산(花山) 양현사(兩賢祠)로 건립되었다. 당시에는 해운당((海雲堂) 남계명(南季明) 선생과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 두 분을 배향하였다. 이후 1959년 기해년에는 중랑장(中郎將) 남영번(南永蕃) 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기존 두 분 선생을 함께 배향하면서 비로소 '상현사(尚賢祠)'라 칭하게 되었다.
중랑장(中郎將) 남영번(南永蕃) 공
상현사의 주벽으로 모셔진 중랑장공의 휘(諱)는 영번(永蕃)이며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그는 고려 왕조의 유신(遺臣)으로, 내시원 신호위 보승 중랑장(內侍院神虎衛保勝中郎將)으로 재직하며 왕씨 정권의 실정을 지켜보았다. 고려의 운명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어느 날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향하였다. 홍무 을사년(1425년)에 울진에서 생을 마감하니, 사림과 백성들은 그를 '모정헌(慕靖獻)의 의(義)를 지킨 충의지사'라 칭송하였다.
해운당(海雲堂) 남계명(南季明) 선생
해운당 선생의 휘는 계명(季明, 1488~1545)으로, 중랑장 남영번 공의 손자이다. '해운당'은 그의 호이다. 그는 생원으로서 이천 훈도(訓導)로 재직하던 중, 요승 보우(普雨)가 학교 재산(學田)을 빼앗는 횡포를 고발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이에 중종(中宗)으로부터 "한유(韓愈) 이후 천 년 만에 남계명(南季明)과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비답(批答)을 받을 정도로 지행이 고결한 현자였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
격암 선생의 휘는 사고(師古, 1509~1572)로, 중랑장 남영번 공의 현손이며 호는 격암이다. 그의 효행은 여남(汝南)의 안자(顔子)에 비견되었고,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역학(易學)에 정통함은 '해동 강절(海東康節)'이라 불릴 정도로 조정과 민간에서 칭송받았다. 말년에는 사직 참봉과 천문 교수를 지냈으나, 세속의 부귀공명을 초탈하고 오직 심오한 천리(天理)를 탐구하고 즐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선생의 현묘한 역리는 물론, 천리안으로 미래사를 예언한 것들이 모두 적중하였다. 심지어 태사성(太史星)의 흐름을 보고 자신의 운명이 다함을 아셨다고 하니, 선생은 열성(列星)의 정기(精氣)를 타고나신 철인이자 이인(異人)이다.
1574년 현령 정구수(丁龜壽)는 향촌의 사림과 함께 격암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여 옥계서원(玉溪書院)을 창건하고 선생을 배향하였다. 이후 몽천사(蒙泉祠)와 향현사(鄉賢祠)를 거쳐 현재 상현사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