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과 조상의 숨결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이 암자는 신미년(辛未年) 늦봄에 처음 세워졌다. 암자에서 수백 보 남짓 내려가면 남쪽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고, 그 시냇가 너른 바위는 옛날 용이 누웠던 자리라, 머리와 뿔, 발톱과 비늘 자국이 지금도 바위 표면에 완연하게 남아 있다.
암자 북쪽에는 팔공산이 겹겹의 봉우리와 험준한 산마루를 구름과 하늘에 맞닿게 드리우고, 마치 두 손 모아 읍하듯 암자를 감싸 안고 있다. 동쪽에는 귀암(龜巖, 거북바위)이 있어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듯 웅크린 형상이며, 서쪽으로 도덕봉(道德峯)을 바라보면 하늘가에 우뚝 솟아 그 산등성이와 봉우리가 뚜렷하다. 그 남쪽으로는 성령(誠嶺)이 마치 거문고를 타는 듯한 형상으로, 봉우리와 산맥이 힘차게 솟아올라 다섯 줄의 현(絃)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 바깥 향암(香巖)에는 신라 시대 옛 절터가 있으니, 이 모두가 빼어난 경관이다.
향암으로부터 푸른 절벽과 검푸른 암벽이 좌우로 깎아지른 듯 서 있고, 그윽하고 깊숙한 길이 시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두 바위가 마치 깎고 다듬은 듯 마주하여 문을 이루니, 높이는 사오 장(丈)쯤 되고 겨우 수레나 말이 지날 수 있을 뿐 다른 길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 길을 따라 암자에 이르는 백여 걸음의 벼랑 돌길은 한 줄기로 매우 깨끗하여, 짚신 바닥에 (이끼나 풀포기가 자라) 가시랭이가 돋을 틈도 없을 정도이다.
암자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계곡물이 폭포를 이루어 절벽에 걸려 나는데, 그 높이가 몇 백 척인지 알 수 없다. 봄과 여름철, 장맛비가 처음 멎고 나면 물거품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골짜기에는 우렛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아래에는 작은 못을 이루니 예연(禮淵)이라 부르는데, 물이 맑고 얕으며 투명하여 그 속에서 폭포수를 맞으며 목욕하기에 좋다. 석벽이 자오(子午, 정남북) 방향으로 마주하여 방처럼 둘러싸고 있어, 비록 찌는 듯한 한여름 무더위에도 마치 서늘한 가을을 품은 듯 시원하다. 그 위에는 반송(盤松) 한 그루가 정자처럼 우뚝 서서 그늘을 드리우니 비를 피하기에 족하다. 이것이 그 대강의 모습이다.
이렇듯 갖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다.
계유년(癸酉年) 늦봄 상순(上旬)에 와룡암(臥龍菴) 주인 남명신(南命新)이 기록한다.

팔공산의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뻗어 나가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귀봉(龜峰)을 빚어냈습니다. 그 봉우리 아래가 바로 용암(龍巖)입니다. 아름다운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숲속 계곡이 깊고 아늑하여, 예로부터 용이 노닐던 곳이라 전해집니다.
입구에는 폭포가 있는데, 숲길 사이로 자연스레 쏟아지는 물줄기는 양옆으로 흩날리며 물안개를 피워 올리고,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번개처럼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냅니다. 골짜기와 산세는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커다란 바위들이 우뚝 솟아 길을 가로막으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백 척 아래 아찔한 풍경이 펼쳐져, 마치 신선이 사는 곳에 앉아 속세를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오른편에는 유독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주 서서 거대한 문을 이루고 있습니다. 높이와 너비가 각각 수십 척에 달하며, 겨우 한 사람만이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이 석문(石門)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명소로 이름나 있습니다. 진정한 비경을 찾아 이곳을 오르는 이들은 오직 한 줄기 길을 따라 나무를 붙잡고 등나무를 타며 힘겹게 올라야만 합니다. 이처럼 험난하기에, 석문을 통하지 않고는 용암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용암 남공(龍巖南公)께서는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셨고, 마침 이 산속에 선영(先塋)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친지와 집을 지을 것을 의논하여 정자를 짓고, '와룡(臥龍)'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사촌 형님, 둘째 형님과 함께 그 정자에서 글을 읽고 자손들을 가르치며 우리 유학(儒學)의 맥을 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맏아들 현령공(縣令公)은 일찍이 문장과 행실에서 큰 성취를 이루어 임금의 은혜로 벼슬길에 올랐고, 재종손 처사공(處士公)은 넓고 깊은 학문과 뛰어난 시로 한 고을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처럼 남씨 가문의 문학이 꽃피운 것은 실로 이 아름다운 산수의 힘입은 바 크며, 또한 이 산수도 그 주인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러나 현령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여러 차례의 상(喪事)과 전쟁의 화(禍亂)를 겪으며 옛 자취는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공의 증손 형일(衡馹)과 족종손(族從孫) 형규(衡奎), 상하(相夏)가 뜻을 모아 정자를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친족들이 한마음으로 이 일에 참여하니,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아! 옛 누대에 다시금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이는 진실로 선조의 뜻을 잇고 그 업을 밝히려는 한결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 그 발자취를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팡이를 짚고 나막신을 신고, 때로는 몸을 구부리고 때로는 펴며 이곳을 거닐면, 바람과 달, 안개와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때마다 마음속 응어리를 풀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산에 오르며 겸손의 도리를 배우며, 물을 보며 쉬지 않고 나아가는 뜻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 이르러서는 조심해야 함을 깨달으니, 이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여 반듯하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처럼 이곳에서 쌓은 보이지 않는 덕(德)이 장차 빛을 발하지 않겠습니까?
형일보(衡馹甫)께서 제게 기문(記文)을 써달라 청하셨으나, 부족함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하여, 삼가 이 글을 지어 드립니다.
병인년(丙寅年) 2월, 경주(慶州) 최효술(崔孝述)이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