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근재공 묘비
근재공 묘비
돌아가신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 근재(謹齋) 남공(南公)의 묘소가 영양군(英陽郡) 파대(坡大)의 해좌(亥坐, 동남향)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세월이 오래되어 혹여 묘역이 무너질까 염려하여, 후손 희룡(熙龍), 상현(相鉉), 석면(錫冕) 등이 장차 돌을 다듬어 묘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보내 비문을 청했다. 여러 번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을 살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諱)는 억령(億齡)이요, 자(字)는 기수(耆叟)이며,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시조(始祖)는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이다.
고려조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휘 홍보(洪輔)가 중세조(中世祖)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영번(永蕃)으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고, 증조(曾祖)의 휘는 수(須)로 호는 송정(松亭)이며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다. 조부(祖父)의 휘는 손(孫)으로 호는 신암(愼庵)이며 절도사(節度使)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찬(鑽)으로 호는 은와(隱窩)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진사(進士) 권게(權揭)의 딸이다.
정덕(正德) 계유년(1513년), 공이 태어나니 용모는 맑고 기개는 호걸스러웠다. 뭇 아이들과 어울려 병정놀이를 할 때에도 법도를 어기는 이가 있으면 회초리로 다스렸다.
글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른들의 채찍질이나 독촉이 없어도 스스로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이에 송당(松堂) 박영(朴英)공이 그의 행동과 글 읽는 법도가 어른과 다름없음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남씨 가문이 필시 창성하여 큰 종중(宗中)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조금의 불편함도 없도록 했다. 어머니가 일찍이 고치기 어려운 병을 앓았는데, 정성을 다해 약을 구해 드려 마침내 효험을 보았다. 훗날 부모님 상(喪)을 연이어 당했을 때에는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기절할 듯했으며, 두 형님을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고 집안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여 막힘이 없게 했다. 큰형님이 당신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살림을 내어주려 하자, 몸이 건장한 종은 형님께 양보하고 자신은 척박한 토지를 가졌다.
일찍이 과거(科擧)에 뜻을 두어 문장과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며, 힘 있는 필체로 쓴 현판과 비석 글씨가 많이 남아 전해온다.
을사년(1545년), 성균관에 글을 보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신원(伸寃, 억울함을 풀어드림)을 간절히 아뢰었고, 영남의 선비들과 더불어 당시 혼미했던 군주(임금)의 각성을 절규하며 촉구했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화(禍)가 일어나 충성스럽고 어진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자, 공은 징을 치며 그들의 무고함을 변론하고자 했으나 큰형님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었다.
정미년(1547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과 층재(冲齋) 양 선생(兩先生)에게 유배형이 내려지자, 공은 슬픔과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벼슬할 뜻을 접어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묘년(1555년), 나라의 변방에 난리가 일어나자 장차 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어버이의 병환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시를 읊어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정사년(1557년)에 흉년이 들자 토지를 팔아 백성들을 구제하니, 많은 이들이 이에 힘입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을해년(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分黨)이 나뉘자 공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선생에게 말하여 이를 힘써 조정하도록 했다.
기축년(1589년), 비결(秘訣) 등의 괴상한 말들이 떠돌아 인심이 소란해지자 공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모반하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다섯 달 만에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공이 종 한 사람을 불러 몸값을 받지 않고 놓아주었는데, 그 종이 훗날 당인(黨人)으로 몰려 화를 입는 일이 있었다.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앞으로 세상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으니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닥칠까 염려된다. 청송(靑松) 고을은 진(秦)나라의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니, 마땅히 그곳으로 가 몸과 집안을 보전함이 옳다."라고 했으니, 뒷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
신묘년(1591년) 8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일흔아홉이었다.
배위(配位)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응규(應奎)의 딸이며 의정(議政)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이다. (배위의) 묘소는 청송(靑松) 화지동(花池洞) 간좌(艮坐)에 있다.
아들은 윤조(胤曺)와 계조(繼曺)이며, 사위는 강원(康遠)이다. 윤조의 아들은 용식(容寔)과 몽남(夢男)이고, 계조의 아들은 우(宇), 수(遂), 관(寬), 실(實)이며, 딸은 민계언(閔繼騫)과 권극형(權克亨)에게 출가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수가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은 넓고 깊은 학문과 강직한 기개로 세상에 나아가 쓰임 받기도 했으나, 다만 미관말직에 머물렀다. 간신들의 모함이 극심하던 시절에 바른말로 간언하는 풍토를 이루지 못했고, 밖으로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어려운 시절에 충의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결국 격류와 같은 세상을 용감히 뒤로하고 물러나 강호의 삶을 달게 여겼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밥 먹을 때나 숨 쉬는 순간에도 잊지 않았다. 시를 읊거나 서신을 주고받을 때에도 나라 걱정하는 마음이 드러났으며, 집안 생활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벗어나지 않았다. 평생토록 남에게 길을 양보할지언정 자신의 영역을 조금도 넓히려 하지 않는다는 옛 가르침을 몸소 실천했으며, 남을 비방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니, 평소 학문에 힘쓴 모습을 또한 엿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남긴 글과 아름다운 행적이 난리 통에 사라져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그 큰 행적만을 뽑아 다음과 같이 명(銘)을 새긴다.
정도(正道)가 아니면 취하지 않아 세상과 화합함이 적었고,
그 자리가 아니면 말하지 않으셨으니 그 마음 어찌 다 드러났으리오.
강호에 기러기 떼 높이 날갯짓하며 노닐지만, 나는 빈 골짜기에 몸을 숨겼노라.
옛 기(杞)와 송(宋)의 지나간 일들 상세히 알기 어렵다하나,
천수백 년 세월이 흘러도 이 돌은 스러지지 않으리.
장사랑(將仕郎) 전 혜릉참봉(前惠陵參奉)
진성(眞城) 이중철(李中轍)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