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신암공 묘역의 위치는 경북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 산57-32번지이다.
신암공 묘비
공의 휘는 손(蓀, 1415~1488), 성은 남씨(南氏), 호는 신암(愼庵)이다.
시조 영의공(英毅公)의 휘는 민(敏)이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중시조는 남홍보(南洪補) 공으로 고려 시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다.
고조(高祖)는 남혁(南奕) 공으로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증조(曾祖)는 남승고(南承顧) 공으로 종부시동정(宗簿寺同正)을, 조부(祖父)는 남영번(南永蕃) 공으로 중랑장(中郎將)을 지냈다.
아버지는 송정(松亭) 남수(南須, 1395~1477) 공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역임했고, 어머니는 대흥 백씨(大興白氏) 부인으로 상호군(上護軍) 백린(白璘)의 딸이다.
공은 영락(永樂) 을미년(1415년) 영해부(寧海府) 인량리(仁良里, 속칭 나라골)에서 감찰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고, 장성해서는 기량이 뛰어나고 지략이 깊었으며 문장과 언변 또한 풍부하여 부친 감찰공도 특별히 여겼다.
선덕(宣德) 2년(1427년, 세종 9년)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략하자, 왕명을 받들어 토벌군이 대마도로 향하던 중 왜구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한 칼에 오랑캐를 무찌르지 못했으니,
어찌 지략 있는 사내라 할 수 있으랴?
나라를 위함에 어찌 사양함 있으리오만,
부모님 생각에 이 몸을 아끼노라.
세종 17년 을묘년(143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의흥위부장(義興衛部將), 군위현감(軍威縣監)을 거쳐 창원병마절도사(昌原兵馬節度使)를 역임했으며, 다스리는 곳마다 백성이 살기 좋은 고을로 이름났다.
경진년(1460년)에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했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기후를 살피며 극진한 효성을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자제들을 가르칠 때 "부모 섬김은 마땅히 신암공(愼庵公)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을유년(1465년)에 어머니 상을, 정유년(1477년)에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예법에 따라 슬픔을 다하며 상례를 치렀다. 상을 마친 뒤에는 세상에 나아갈 뜻을 접고 오로지 심신 수양에 힘썼다. 누대(臺)를 쌓고 못을 파서 한가로이 노닐며 편안히 즐겼는데, 시를 지어 그 뜻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맑고 시원한 바위 누대(臺)에 해는 길기도 한데,
또 이와 같이 읊었다.
덧없는 백년 인생 문득 지나가는 속에,
천고 영웅호걸도 성공과 실패 있었건만,
나는 오로지 성현의 삶 본받아 편안히 받아들이니,
한평생 한가롭지 않은 날이 없도다.
이와 같이 자유롭게 세상을 벗어난 뜻을 지녔다
만만년에는 영양(英陽) 동부리(東部里)로 옮겼다가 다시 일월(日月) 섬촌리(仙村里)로 이거했다. 무신년(1488년) 침소에서 평안히 영면하니, 영양현 옛 교동(校洞) 자좌(子坐) 언덕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돈용부위(敦勇副尉) 오계동(吳季同)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부사과(副司果) 남진(南鎭), 차남은 남찬(南鑽, 1451~1511), 삼남은 남정(南釘)이며, 따님은 교리(校理) 홍언충(洪彦忠, 1473~1508)에게 출가했다.
남진(南鎭)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남세기(南世紀)와 남세강(南世綱)이며, 따님은 현감(縣監) 정교(鄭僑) 권의형(權義衡)에게 출가했다.
남찬(南鑽)은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아들은 남천령(南千齡), 남만령(南萬齡), 참봉(參奉) 남억령(南億齡)이며, 딸들은 함양(咸陽)의 오필(吳畢, 영양 입향조), 정창세(鄭昌世), 박순년(朴舜年)에게 각각 출가했다.
남천령(南千齡)은 아들 넷을 두었으니 남기룡(南起龍), 남기호(南起虎), 남기붕(南起鵬)이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한 명 더 있는 듯하다) 딸들은 오광준(吳光俊), 이몽룡(李夢龍), 임충국(任忠國)에게 출가했다.
남만령(南萬齡)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남영청(南永淸)과 남익청(南益淸)이며, 따님은 박희성(朴希聖)에게 출가했다.
남억령(南億齡)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화왕산 전투에서 순절한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윤조(南胤曹) 공과, 어머니를 모시고 청송(靑松)으로 입향하여 세거한 통정대부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曹) 공이다.
남정(南釘)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남세림(南世淋)과 남세벽(南世壁)이다.
남세기(南世紀)는 아들 남한(南漢)을 두었고, 따님은 권대방(權大防)에게 출가했다.
남세강(南世綱)은 아들 셋을 두었으니 남승권(南承權), 남계권(南繼權), 남희권(南希權)이며, 따님은 전백경(全百頃)에게 출가했다.
남세벽(南世壁)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남미수(南眉壽)와 남덕수(南德壽)이며, 이 이하 후손들은 지면 관계상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아! 공은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오랜 관직 생활 동안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 세상의 부침에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때를 보아 물러나 자연에 귀의하여 여유롭게 지내다 생을 마쳤으니, 진실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 현명하게 몸을 보전한 군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오랜 세월과 전란으로 인해 남겨진 글과 아름다운 행적이 백분의 일밖에 전하지 않음이 한스러울 따름이며, 이에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후손 아무개 등이 장차 묘도(墓道)에 비를 세우고자 나 김흥락(金興洛, 1827~1899)에게 비문을 청했다. 돌아보건대 나는 연로하고 문재(文才)가 없어 어찌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나의 선조인 통례공(通禮公)이 공과는 동서지간(同婿之間)으로, 일찍이 부위공(副尉公, 오계동 공)의 묘갈명을 함께 지은 인연이 있으며, 그 후로 여러 대에 걸쳐 우리 가문이 공의 묘역을 함께 수호해 왔다. 이에 비록 십 대나 되는 먼 세대의 일이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전해오는 기록(遺事)에 의거하여 그 시작과 끝을 차례대로 간추려 적고 이렇듯 개인적인 소회를 덧붙이는 바이다.
고종 35년 무술년(1898년) 11월
문소(聞韶) 김흥락(金興洛)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