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과 조상의 숨결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석호공유허비는 1994년 입석회관(석호정) 준공 시 함께 마당에 세워졌다.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8-3번지에 위치한 입석회관은 현대식 건물로 과거 K2 비행장에 수용되어 사라진 석호정을 대체한다 하여 '석호정'이라 불리기도 했다. 석호공유허비는 근 28년간 입석회관에 자리하다 건물 노후와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매각 결정을 한 후 2022년 가을 무렵 유허비 보존을 위해 대암 선산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호처사영양남공유허비
팔공산 동편(八公山東便)에 산수(山水)의 경치(景致)가 아름답고 숲이 좋아 집터로써 특별(特別)히 뛰어난 입석(立石)마을은 나의 선조(先祖)이신 석호공(石湖公)이 자리를 잡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문중(門中)을 형성(形成)하고 살던 곳이라 인물(人物)이 뛰어나고 집안이 대단하여 우리 문중(門中)에서 최고(最高)이고 예(禮)를 숭상(崇尙)하는 풍습(風習)과 충성, 신의, 효도(忠誠信義孝道)와 우애(友愛)를 행(行)함은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졌더라.
동리(洞里) 남(南)쪽에는 유려한 정자(亭子)가 있었으니 석호공(石湖公)께서 학문(學文)을 닦고 효도(孝道)를 하던 곳이며 그 후손(後孫)들이 조상(祖上)을 섬기며 살던 곳이라.
지난 경인년(庚寅年) 6.25전쟁으로 이곳이 비행장(飛行場)이 되니 마을은 없어지고 정자(亭子)가 헐리게 되어 살던 곳이 없어지면서 모두가 슬픈 상처(傷處)를 입었으니 하물며 후손(後孫)들은 얼마나 슬프고 괴로웠겠는가.
효손(孝孫)들이 이 두렵고 슬픈 생각(生覺)에서 석호공(石湖公)의 유묵지(遺墨地)에 정자(亭子)를 새로이 지으니 완전(完全)하고 아름다워서 조상(祖上)을 섬기고 제사(祭祀)를 올리게 된 것을 다 훌륭하다고 공경(恭敬)할 것이니라.
어느 날 공(公)의 후손(後孫) 효일, 효택(孝日 孝澤) 두 분이 후손(後孫) 대곤씨(大坤氏)가 찬(撰)한 유사(遺事) 및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최현필 옹(崔鉉弼翁)이 찬(撰)한 묘비문(墓碑文)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정자(亭子)는 새로 지어 석호공(石湖公)의 유묵지(遺墨地)에 유허비를(遺墟碑)를 수갈(竪碣)하고저 함이나, 세월(歲月)이 오래도록 버려두어 없어질까 두려우며 나타내지 못한 즉(卽) 자손(子孫)으로서 죄(罪)를 짓는 것이니라.
곧 유허비(遺墟碑)를 수갈(竪碣)하여 후손(後孫)에게 전(傳)하고저 감히 비문(碑文)을 청하노니 잊지말아라. 내 스스로 돌아보니 아는 것도 없는 데 가(敢)히 이 부탁을 일가(一哥)이기에 거절(拒絶)치 못하고 행장(行狀) 그대로 비문(碑文)을 쓰노라.
공(公)의 휘(諱)는 실(實)이요 자(字)는 신보(信甫) 호(號)는 석호(石湖)이며 남씨(南氏)로서 당(唐)나라 안렴사(按廉使) 영의공(英毅公) 휘 민(諱敏)을 시조(始祖)로 식읍지(食邑地)는 영양현(英陽縣)이며 본관(本貫)은 영양(英陽)이다. 고려조(高麗朝) 휘(諱)는 홍보(洪輔) 중대광공(重大匡公)을 영양군(英陽君)으로 봉(封)하고 누전(累傳)하여 휘(諱) 영번(永蕃) 중랑장(中郎將)은 고려(高麗)의 운(運)이 다 하였음에 조용히 숨어서 지내셨다.
울진화방(蔚珍花坊)에 모시고 제사(祭祀)지내고 다음 내려와서 휘 수(諱須)요 문과(文科)에 과거(科擧)하여 용담현령, 감찰어사(龍潭縣令 監察御史)를 지낸 단묘유신(端廟遺臣)으로 호(號)는 송정(松亭)이며 공(公)의 오세조(五世祖)라 고조(高祖) 휘(諱)는 손(蓀)이요 진주병사(晋州兵使)이며 호(號)는 신암(愼庵)이며 증조(曾祖) 휘(諱)는 찬(鑽)이요 부사과(副司果)이고 호(號)는 은와(隱窩)이며 조(祖) 휘(諱)는 억령(億齡)이요 참봉(參奉)으로 호(號)는 근재(謹齋)이며 고(考) 휘(諱)는 계조(繼曺)요 호(號)는 운강(雲岡)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임란(壬亂)에 백씨(伯氏)는 의병(義兵)에 나가셨고 어머님을 모시고 청송(靑松)으로 들어 오시었다. 비(妣)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여신(汝信)의 후(后) 방준(邦俊)의 여(女)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인(士仁)의 여(女)이다. 공(公)은 김씨(金氏) 출(出)이며 기해생(己亥生)이다. 기질(氣質)이 강직(剛直)하고 명민(明敏)하며 재조(才操)는 특출(特出)하여 7세에 후원(後園)에서 놀 때 한 뿌리에 네 가지 나무를 보고 나무꾼에게 나무를 베지 말라 하니 운강공(雲岡公)이 보시고 무슨 연고냐고 물으셨는데 대답(對答)하기를 나무가지가 넷이니 나의 형제(兄弟)와 같은 고(故)로 사랑하고 보호(保護)하고저 함이라 하니 듣는 이는 모두들 크게 기대(期待)하더라.
백씨(伯氏) 돈재공(遯齋公)은 경당(敬堂) 장선생(張先生장선생)과 교분(交分)이 가까워서 자주 방문(訪問)할 때 공(公)의 나이 9세라 사람들과 응대((應對)하는 것이 어른과 같고 글 읽는 소리는 옥소리 같아 선생(先生)이 사랑을 달리하여 시험해 물어보니 막히는 것이 없더라. 선생(先生)이 돌아가서 말하기를 남모씨(南某氏) 집안이 크게 번창할 것이다.
누차(累差)에 서찰(書札)이 왕복(往復)함에 공(公)은 장선생(張先生)을 찾아가 큰절하고 문인(門人)됨을 허락(許諾)받았다. 운강공(雲岡公)의 연세가 80세여서 혹시(或是) 편치 않을 때가 있으면 백씨(伯氏) 돈재공(遯齋公)의 연세도 육순궁년(六旬窮年)으로 대인공(大人公)의 약(藥)을 다려 올릴 때 공(公)은 백씨(伯氏)곁을 떠나지 않았고 가정교훈(家庭敎訓)을 잘 받들고 많은 책(冊)을 읽고 조용히 법도(法度)를 지키면서 더욱 열심히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배우니 학문(學文)이 풍부(豊富)하여 그 때 이름있는 선비나 유가(儒家)에서는 모두가 자랑하더라.
조정(朝廷)이 어지러운 광해군 때(光海君時) 인목대비 폐모(仁穆大妃廢母)와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지변(殺害之變)에 이오리, 이백사, 정동계 제선생(李梧里李白沙鄭桐溪諸先生)이 잡혀서 죽거나 숨거나 하는 것을 공(公)은 개탄(慨嘆)하면서 시 일수(詩一首)를 읊음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나 빛은 반드시 땅에 다다를 것이니라’ 하고 바깥 출입(出入)을 하지 않고 은둔(隱遁)하였고 질서 이석병, 휴운(姪壻石屏休運)과 더불어 과거(科擧)에 나가지 않기로 동맹(同盟)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삼학사(三學士) 순국소식(殉國消息)을 듣고 탄식(嘆息)하고 상시(傷心)하였으니 비록 전원(田園)에서 농사(農事)를 짓고 살아도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精誠)은 변(變)함이 없더라.
인조(仁祖)가 즉위(卽位)함에 공직(公職)에 나가고자 세 차례나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정자(亭子)를 짓고 날로 단정(端正)히 앉아서 기대고 기우는 법이 없었으며 옛 서적(書籍)을 열심히 공부(工夫)하였다.
신유(辛酉)에 아버님 상(喪)에는 슬퍼하면서 예(禮)를 마치고, 만년(晩年)에 어머님을 모시고 대구 동촌 입석(大邱東村立石)에 이거(移居)하니 선영을 멀리하고 형제(兄弟)가 서로 떨어지니 한(恨)이 되어 돈을 보내고 향화나 제수(祭需)를 고향(故鄕)에 보내는데 조리와 법도가 있는 처리(處理)를 하시었다.
신해(辛亥) 12월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72세라 장지(葬地)는 단산지(丹山地) 임좌(壬坐)에 모시다.
배(配)는 가평이씨(加平李氏) 란수(鸞壽)의 여(女)이며 정숙(貞淑)하고 부드럽고 순하며 덕(德)이 있었다.
아들은 둘이니 장(長)에는 두극(斗極) 차(次)에는 두형(斗衡)이라 두극(斗極)의 아들에게는 천핵(天融), 천우(天羽), 천한(天翰)이요, 두형(斗衡)의 아들에는 천훈(天薰), 천태(天泰)라 증손, 현손(曾孫玄孫)이하(以下)는 많아서 다 기록(記錄)치 못한다.
슬프다. 오직 공(公)은 핫문(學文)이 참으로 정당하며 행의(行誼)가 돈독하고 성실(誠實)하시었다. 최부정공(崔副正公)의 묘갈문(墓碣文)에 할말을 다하였으므로 어찌 쓸데없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공(公)은 충성(忠誠)과 효도(孝道)의 집안에서 태어나 포부가 크고 마음속이 깊어서 윤리(倫理)를 가장 소중히 하고 조용히 성현(聖賢)의 글을 읽으시고 득실(得失)을 권(勸)하지도 말리지도 않고 남을 헐뜯거나 칭찬(稱讚)하는 일도 아니하며 매일(每日) 성리서(性理書)를 더욱 열심(熱心)히 읽으시고 바깥 출입(出入)을 아니하고 책(冊)읽는데 부지런하시었다. 한 가지 도학(道學)을 듣게 되면 죽기전에 알아야만 한다는 정신(精神)이었으니 그 어찌 위대(偉大)하지 않으랴.
이제 유허비(遺墟碑) 수갈(竪碣)하는 돈은 후손(後孫) 윤환씨(輪煥氏)가 독담(獨擔)하고 정자((亭子) 중건(重建)의 돈을 승환씨(承煥氏)가 특별(特別)히 많이 내니 그 어찌 성(盛)한 일이 아니리오.
탁월(卓越)하신 석호공(石湖公)은 재주가 뛰어나고 영민하도다.
송정공(松亭公)의 풍습(風習)과 법도(法度)요
운강공(雲岡公)의 유운(遺韻)이로다.
시례(詩禮)를 생활화(生活化)하고 인륜(人倫)을 날로 돈독(敦篤)히 하였도다.
경당선생(敬堂先生)에게 칭찬을 받음은 어릴 때부터 이셨다.
글을 배울 적에는 선생(先生)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고 학문(學文)은 크고 넓었다.
모든 행실(行實)의 근본(根本)은 오직 효도(孝道)를 숭상(崇尙)함이로다.
세 형님과 우애(友愛)하여 책상을 맞대고 학문(學文)을 닦았도다.
마침 혼란한 조정(朝廷)에서는 모함을 일삼았도다.
혹시(或是)숨거나 죽는 것을 보고 근심하였도다.
팔공산(八公山) 양지(陽地)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숨었도다.
바깥 세상(世上)을 사절하고 문을 닫고 고고히 사시었도다.
경인란(庚寅亂)에 자손(子孫)들이 살던 곳이 헐리었도다.
생각(生覺) 옛 사시던 곳이 해안촌(解顔村)이로다.
후손(後孫)들이 의논해서 정자(亭子)를 새로 지으니 옛 자취가 빛이 나도다.
빛나는 일을 돌에 새겨 대대로 전하노라.
갑술단양월기망(甲戌端陽月旣望)
족 후손(族後孫) 형종(灐鍾) 근찬(謹撰)
후손(後孫) 승환(承煥) 표면(表面) 근서(謹書)
족 후손(族後孫) 재명(在明) 이면(裏面)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