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내가 일찍이 청수(靑水) 지역을 유람하다가 그곳의 사대부들과 만나 교유한 적이 있다. 그들은 옛사람들의 행적을 살피고 아는 데 있어 조예가 깊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오가동(五佳洞)에 사는 분들이 그곳에 있는 돈재(遯齋) 남공(南公)의 묘에 비명을 지어달라고 나에게 청하니, 이 명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글을 짓는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 어찌하여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인지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살펴 보건대, 공의 휘(諱)는 우(宇)이다. 영양 남씨(英陽南氏)는 신라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으로부터 시작되어, 고려 시대에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휘 홍보(洪輔)가 거듭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했다. 공의 오대조 할아버지 휘 수(須)는 평민의 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에 이르렀고, 고조부의 휘는 손(蓀)이니 진주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호는 신암(愼庵)이다.
증조부의 휘는 찬(鑽)이니 내금위 부사과를 지냈고 호는 은와(隱窩)이다.
조부의 휘는 억령(億齡)이니 참봉을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계조(繼曺)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호는 운강(雲岡)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이방준(李邦俊)의 딸이다.
공은 융경(隆慶) 임신년(1572년)에 영양(英陽) 도항리(道項里) 댁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슬기로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강공(文康公)도 그를 칭찬하며 남다르게 여겼다. 자라서는 남달리 뛰어난 기개로 널리 배우고 담론하기를 즐겼으며, 글솜씨 또한 매우 소탈하고 꾸밈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백부(伯父)인 휘 윤조(胤曺)가 곽충익(郭忠翼) 공의 의병 진영에 참여했다. 그때 부친 운강공(雲岡公)이 조모님(운강공의 모친)을 모시고 청송(靑松)으로 피난할 때, 공(돈재공)이 백부를 따라 의병에 참여하려 했으나 백부가 허락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에 곽충익 장군에게 글을 올려 왜적을 토벌할 계책을 아뢰었으며, 매일 밤 서쪽(임금 계신 곳)을 향해 향을 피우고 승전을 하늘에 빌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진중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며 ‘나라의 큰 기둥(長城)이 무너졌으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했다.
정유년(1597년)에 화왕(火旺) 의병 진영에서 백부가 순절하자, 공이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수많은 의병들의 유골이 산처럼 쌓이고 들판을 덮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에 백부의 유품인 옷가지를 조부 묘 아래에 묻어 장사 지냈다.
부친 운강공이 항상 형제(공의 백부)의 죽음을 가슴에 품고 슬퍼하니, 공은 밤낮으로 아버지를 위로하며 지성으로 봉양했다. 운강공이 돌아갔을 때에는 상주로서 예를 다하여 그 정성이 이웃 마을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집 근처에 정사(精舍, 공부하는 집)를 짓고 그 이름을 ‘직방(直方, 곧고 반듯함)’이라 하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 학문 연구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관찰사(도백)가 천거하여 사재감 참봉에 제수되었다.
당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했으나, 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의병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나는 늙어서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고, (청나라와) 강화(講和)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피 시 한 수를 읊었다.
동해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東海寧投足)
서쪽 하늘(청나라)을 이고 살지는 않으리. (西天不戴頭)
그리고 그 뒤 대문에 ‘대명처사(大明處士,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는 선비)’라 써 붙였다. 숭정(崇禎) 무인년(1638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9세였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생원 구연(具淵)의 딸이다.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 두일(斗一)은 첨정을 지냈고, 딸들은 이윤휴(李運休)와 사예(司隷) 김윤(金允)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는 두 분으로, 천주(天柱)는 형조참의요, 세주(世柱)는 호군이다. 참의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계훈(啓熏)은 공조참판이요, 처훈(處熏)과 시훈(時熏)이 있으며, 딸 둘은 권도구(權道矩)와 장격(張格)에게 시집갔다. 호군공은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자훈(自熏), 응훈(應熏), 유훈(有熏), 필훈(必熏), 시훈(是熏)이며, 딸 셋은 고중후(高重厚), 이익화(李益華), 홍한세(洪翰世)에게 시집갔다. 현손 이하는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이 명(銘)을 청한 사람은 성철(聲喆), 찬하(贊夏), 두운(斗運), 상현(相鉉)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을 새긴다.
기산(箕山)의 절개, 백이(伯夷)의 곧음이 예부터 전해지지 않았던가?
공 또한 세상을 피해 의리를 지킨 같은 분이니,
한때의 침묵에 그치지 말고
길이 푸른 구름처럼 맑고 깨끗한 그 모습, 백세에 영원히 빛내라.
광무 5년(고종 38년, 1901년) 신축년 가을 8월 상순
통정대부 전 행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