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스킵네비게이션

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운강공파와 청송

겸와공묘역

겸와공묘역

겸와공 묘역

운강공 2남 겸와공 묘역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산64번지에 위치해 있다. 장남 두문과 함께 자리해 있다.


겸와공 묘갈명 번역문

공의 휘(諱)는 수(遂), 성은 남씨(南氏), 호는 겸와(謙窩)이다. 시조 영의공(英毅公) 휘 민(敏)이 영양(英陽)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그곳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시호 또한 영의공이다.

중세에 휘 홍보(洪輔)라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 대광(大匡)으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영양군(英陽君)에 거듭 봉해졌다. 고조부의 휘는 손(孫), 호는 신암(愼庵)이며 의흥위 부장과 군위현감을 지냈다.

증조부의 휘는 찬(贊), 호는 은와(隱窩)이며 금위부 사과(司果)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억령(億齡)이니 기자전(箕子殿) 참봉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계조(繼曺)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호는 운강(雲岡)이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형님인 휘 윤조(胤曺)에게 권하여 곽충익공(郭忠翼公, 망우당 忘憂堂) 의병 진영에 참여하도록 하고, 어머님을 모시고 청송(靑松) 안덕(安德)으로 피난했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처사(處士) 이방준(李邦俊)의 딸이며 참판 이여신(李汝信)의 후손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이미 성품이 배움을 즐겨 하여, 남에게 업혀서라도 글 읽는 방으로 데려가 달라 조르곤 했다. 겨우 학문을 시작할 나이에,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글귀를 유창하게 읽었다. 문리가 어려운 곳에 이르면 한두 번 깊이 생각하여 막힘없이 이해하니, 선친(운강공)이 장차 집을 떠나게 되어 공의 재능을 시험해 보려고 《통감(通鑑)》 반 권을 대강 가르쳐 주며 이르기를,
“내가 사흘 뒤에 돌아올 것이니, 반드시 꼼꼼하고 확실하게 읽고 외우도록 하여라.”
하고 기일이 되어 돌아오니, 등을 돌리고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몇 달이 되지 않아 그 책 한 권을 문득 통달하고는, 일찍이 ‘사람이 되는 모든 이치가 이 한 권의 책에 다 담겨 있구나’라고 말했다.

어버이를 섬기고 몸가짐을 하는 데 있어 하나같이 《소학》의 가르침에 따르니,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일찍이 선친을 방문했을 때, 공이 총각(어린아이)의 나이로 곁에서 모셨는데 그 행동거지가 어른과 같아 여헌 선생이 감탄하며 남다르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선생은 도산(陶山) 이황(李滉) 선생의 제자로, 평소 제자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나 공을 보고는 문득 그 뛰어남을 가상히 여겼다.

임진왜란 때 백부(伯父)인 통정공(通政公, 남윤조)이 의병에 참여하려 하자 공도 뒤따르려 했으나, 통정공은 ‘네게는 아직 모셔야 할 아버님(운강공)이 계신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다시 일어나 통정공이 화왕산(火旺山)에서 순절하니, 맏형인 돈재공(遯齋公) 남우(南宇)와 함께 달려가 초혼사(招魂辭)를 지어 혼을 모셔오고, 유품인 옷을 조부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그때는 병사들이 창칼로 싸우며 어수선하고 당파 싸움이 극심하여 임금(선조)이 시로써 그 뜻을 보이며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들은 오늘 이후로 다시는 동인, 서인으로 나뉘지 말라.”
하거늘, 공이 당시 영의정이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상공에게 글을 올려 아뢰기를,
“나라가 위급한 때에 성상께서 몹시 마음 아파하시니, 대개 사람이 반드시 먼저 화합한 후에야 뒷일을 도모할 수 있다. 합하(閤下)는 국가의 주춧돌 같은 신하시니, 어찌 힘을 다해 (백성을) 화합시키고 (나라를) 회복할 방도를 온전히 하여 임금님의 뜻에 보답하지 않는가?” 라고 했다.

이 해에 서애 선생이 공을 조정에 천거하여 능참봉(陵參奉)과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제수되어 이로부터 임금의 은혜가 자못 두터웠으나, 혼탁한 조정이 계속되어 정치는 어지럽고 인륜과 강상이 무너지자, 공은 곧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소를 올려 항거하려 했으나 형님 돈재공이 말려 끝내 실행하지는 못했다.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을 하자 한 시대의 현인들이 차례로 등용되어 다시 벼슬을 했으나, 공은 산림에 숨어 지내며 세속의 욕심 없이 평안하게 지내어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병자호란에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소문을 듣고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사십 일 동안 비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성(남한산성)에서 단 한 사람의 신하도 의롭게 나서지 못했으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하고, 드디어 주먹을 불끈 쥐고 칼날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죽을 각오를 했으나, 성 아래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그 뜻을 접었다. 이로 인하여 산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세상일을 사양하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끊으니, 사람들이 혹 당시의 일로 찾아와 말하려 하면 문득 손을 휘저으며 듣지 않았다.

사는 곳 가까운 곳에 대명동(大明洞)이 있으니, 이는 곧 두곡(杜谷) 고응척(高應陟) 공이 노닐던 곳인데, 그 아래에 집을 짓고 매일 벗들과 함께 꽃을 평하고 시를 읊으며, 특히 ‘숭정(崇禎)’이라는 명나라 연호 두 글자를 대문 위에 써 붙이고, 이를 통해 나라를 생각하는 감회를 부쳤다.

태어난 해와 돌아가신 해는 자세하지 않으나, 묘는 월매(月梅) 평지산(平地山) 경좌(庚坐)에 있다. 부인은 숙인(淑人) 여주 민씨(驪州閔氏)로 생원 민근효(閔根孝)의 따님이며 문도공(文度公) 민제(閔霽)의 후손이다. 묘는 공의 묘 아래에 함께 모셨다.

삼남 오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두문(斗文), 두혁(斗爀), 두환(斗煥)이다. 두문은 찰방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딸들은 김정(金町), 현감 문수검(文守儉), 김박(金璞), 구진원(丘晋元), 고태건(高太健)에게 각각 시집갔다. 두문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 민주(旻柱)는 참판에 추증되었고, 극주(極柱)와 한주(漢柱)가 있으며, 딸들은 김이억(金爾億)과 김성구(金聖矩)에게 시집갔다.

두혁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으니, 아들은 지주(砥柱)요, 딸들은 심석(沈晳)과 김하상(金夏相)에게 시집갔다. 민주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지훈(之熏)은 가의대부요, 후훈(厚熏)은 가선대부이다. 극주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오훈(五熏)은 첨추요, 신훈(信熏)이다. 한주의 아들은 중훈(重熏)이요, 지주의 아들은 영훈(永熏)이다. 현손과 그 이하 자손들은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민간의 미천한 선비로 처신했으나 나라를 근심하는 의로운 마음을 품었고, 어리고 약한 시절부터 학문을 즐기는 부지런함과 독실한 정성으로 《소학》을 기본으로 삼고 제자백가의 글까지 널리 통달했으며, 어버이 섬김을 떳떳한 도리로 여기고 나아가 오복(五服)을 입는 친족과 구족(九族)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대했다.

늘그막에 어진 정승의 천거에 힘입어 참봉 벼슬을 했으나, 다시 시세를 살펴 산중에 물러나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본심을 바꾸지 않았고, 궁벽한 곳에 사시면서도 온전히 명성을 지켰다. 스스로를 하늘 아래 평범한 백성이라 여기면서도 숭정 연호에 담긴 높은 절개를 굳게 지켰으니, 그의 맑은 바람 같은 아름다운 운치는 족히 후세의 게으른 사람을 분발하게 하고 악한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 것이다.

후손 희룡(熙龍), 지철(止喆) 등이 공의 묘에 아직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여, 집안 젊은이인 기락(基洛)을 보내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스스로 생각건대 늙고 병들어 진실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듯하나 또한 사양함이 용납되지 아니하여, 드디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명(銘)을 지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
씩씩한 공은 충효로써 삶의 근본을 세웠네.
밭고랑 사이 초야에 살면서도 늘 나라를 근심했으며,
그 뜻은 갑옷 입고 싸움터에 힘껏 달리고자 했네.
난리 통에 부모님 모시고 피란하며 좋은 음식 봉양을 거르지 않았네.
여헌 선생의 칭찬을 받았고 비지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았도다.
나라에서 불렀으나 초야에 머무르며 평민으로 살았네.
푸른 골짜기 안개와 아지랑이 속에 붉은 해와 달처럼 빛났네.
뚜렷한 그 무덤 평지산에 드높이 있으니,
이 명(銘) 새김에 부끄럼 없으니, 삼척 비석에 그 공적 기리네.

완산(完山) 류연즙(柳淵楫) 삼가 지음

겸와공묘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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