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과 조상의 숨결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17세조 예연(禮淵,號) 휘(諱) 석로(碩老, 1726~1771)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석호공(碩湖公)의 현손(玄孫)이다. 그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로 이름을 알린 공은 2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751년(영조 27년, 원문 기록 기준) 26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예조좌랑(禮曹佐郞)과 만경현령(萬頃縣令, 현 김제시 만경읍 일대)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사관(史官)으로 재직할 때는 빼어난 문장과 필력으로 영조(英祖)의 주목을 받았으며, 어전(御前)에서 맹자(孟子)를 강론할 때는 명료한 음성과 깊이 있는 학식으로 왕으로부터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예연공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비운의 왕세자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와의 깊은 관계이다. 그는 영조와 세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크게 염려했으며, 세자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려는 움직임, 특히 세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려는 '금고(禁錮)' 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의 강직함과 충심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일화가 있다. 세자를 음해하는 내용의 상소가 올라왔을 때, 영조는 공에게 그 상소를 어전에서 낭독하라고 명했다. 상소에는 신하로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불경스러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은 왕명에 따라 낭독하면서도,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하여 문제가 될 만한 구절들을 교묘하게 수정하거나 건너뛰며 읽었다. 이를 눈치챈 영조가 크게 노하여 여러 차례 제대로 다시 읽으라고 엄명을 내렸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게 같은 방식으로 낭독을 마쳤다. 그의 의연한 태도와 충심에 영조마저 감동하여 노여움을 풀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사도세자는 예연공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그대야 말로 우리나라 제일의 충신"이라고 극찬하며 깊은 신뢰를 보였다.
그러나 시대의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다. 1762년(영조 38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나는 참혹한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자, 공은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 그 즉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은둔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으나, 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병을 얻어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가 왕위에 올라 아버지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공을 찾았으나,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크게 놀라며 애석해했다고 한다. 그의 충절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오랫동안 지방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던 탓에 그의 뛰어난 행적이 중앙 정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이에 광무 6년(1902년), 도사(都事) 권돈연(權敦淵)을 비롯한 영남 지역의 선비들이 예연공의 숨겨진 충의(忠義)를 기리고 그에게 합당한 국가적 예우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간절히 청원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글은 공의 인품과 충절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은 문관으로서의 능력 뿐만 아니라 실무에도 밝았다. 그가 만경현령으로 재직할 때 작성한 보고서인 '보순사첩(報巡使帖)'에는 당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교역 관계와 외교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외교사 및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예연공은 뛰어난 학문과 문장력,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 그리고 위기 속에서도 신념을 지킨 용기와 충성심으로 기억되는 조선 후기의 주목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