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스킵네비게이션

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운강공파와 청송

운강공 묘도비

운강공묘도비각

운강공묘도비

운강공 묘갈명 (번역문)

문강(文康)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평소 덕행과 도학 및 예능으로 인물을 평론했는데, 일찍이 운강(雲岡) 남공(南公)을 댁으로 초청한 뒤 이렇듯 칭찬하며 감탄했다.

"형은 의병에 참여하여 나라에 충성했고, 아우는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니, 가히 충효를 모두 온전히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이는 운강공이 임진왜란을 맞아, 맏형은 곽충익(郭忠翼) 장군의 의병 진영으로 나아가고 공은 집에서 노모를 봉양하여 충과 효의 절개를 모두 지켰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문강공이 그토록 칭송하며 깊이 감복한 까닭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삼백여 년이 지나도록 묘갈명이 없었으므로, 후손 희건(熙建), 희호(熙毫), 기운(祺運) 등이 집안의 젊은이인 구석(龜錫)을 나에게 보내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청했다. 내가 여러 차례 사양했으나 설득되지 않아, 삼가 가장(家狀, 고인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살펴 다음과 같이 그 행적을 기술하고 명(銘)을 이어 붙인다.

공의 휘(諱)는 계조(繼曺)요, 자(字)는 선술(善述)이며, 운강(雲岡)은 그의 호이다.

남씨(南氏)의 본관은 영양(英陽)인데, 시조의 휘는 민(敏)이고, 그 후손으로 휘 홍보(洪輔)라는 분이 있으니 고려 시대에 대광(大匡) 벼슬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수(須)라는 분이 있었는데, 문재(文才)로 천거되어 용담현령을 지냈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선위하자)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휘는 손(蓀)이니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찬(鑽)이니 부사과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억령(億齡)이니 천거로 참봉을 지냈다.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좌의정 조익청(曺益淸)의 후손인 사인(士人) 조응규(曺應奎)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년) 2월 16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용모가 빼어나고 몸가짐이 단정했으며, 문학적 재능 또한 일찍이 성취하여 여덟 살 때 선친(先親)을 따라 등산했을 때, 선친이 시를 지어보라 명하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꽃은 피어 온 봄의 빛을 드러내고, 산은 만고의 세월을 머금었네 (花發三春色 山含萬古)”라고 답하니, 선친이 그가 장차 크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갑인년(1554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치르는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

모부인은 성품이 엄격하여 자녀를 가르침에 관용이 없었는데, 공은 더욱 정성과 효도를 다하여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피고 새벽에는 문안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가 어른인 비지 치리(賁趾致利, 남치리)는 도산(陶山, 이황) 선생에게 학문을 배워 후학들을 가르쳤고, 삼종형(三從兄, 팔촌 형)인 참봉 정방(靖邦, 남정방)은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琦) 선생의 문인으로 경서에 밝았는데, 공은 이 두 분 사이를 오가며 학문을 묻고 스스로 학업에 힘썼다. 수월(水月) 조검(趙儉) 선생과 사월(沙月) 조임(趙任) 선생은 공의 문학을 흠모하여 높이 받들고 존경하며 예우했다.

임진왜란 때 형님이 모부인이 연로하고 병환이 잦은 까닭에 차마 화왕(火旺)의 의병 진영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자, 모부인이 ‘대의를 지켜야 한다!’고 꾸짖었다. 또한 공은 어머님 봉양을 자임하면서도, 마치 자신 또한 의병으로 나아가는 듯한 충심을 시로써 표현하고, 날마다 어머님을 위로하며 음식 공양을 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모부인을 모시고 청송(靑松)의 안덕(安德)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지산(芝山) 조호익(趙好益) 선생과 끊임없이 교유하며 도의로써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다.

선대의 묘소가 멀리 영양 땅 백 리 길 밖에 있었는데도 매월 성묘했으며, 때때로 구름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언덕에 올라 형님을 생각하며 스스로 호를 운강(雲岡)이라 했으니, 이는 ‘구름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고, 언덕에 올라 형님을 생각한다(望雲而思鄉 陟岡而思兄)’는 뜻이다.

정미년(1607년)에 모부인상을 당하여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라 상을 치렀다.

형님이 마침내 화왕 의병 진영에서 순국하자, 통곡하며 초혼사(招魂詞)를 지어 선친의 묘 아래에 장사 지내고, 상복을 벗은 뒤에는 묘 아래에 집을 짓고 매일같이 성묘하여, 나이 일흔이 넘어서도 이를 거른 적이 없었다.

집안 살림은 번화하거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과정을 엄격히 세웠으며, 향리에서는 여씨향약(呂氏鄉約)을 모범으로 삼아 실천했다.

일찍이 입암(立巖)에서 임진왜란을 겪었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은 공의 의로운 행실을 듣고 지극히 칭송했으며, 관찰사 김수(金睟) 공은 공의 재능과 행실을 조정에 천거하여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천계(天啓) 신유년(1621년) 8월 23일에 생을 마쳤다.

부인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이조판서 이여신(李汝信)의 후손인 사인(士人) 이방준(李邦俊)의 딸이다. 성품이 온유하고 총명하여 남편을 섬기는 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사남 이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우(宇), 수(邃), 관(寬), 실(實)이다. 우는 천거로 참봉이 되었고, 수는 참봉을 지냈다. 딸은 권극형(權克亨)과 민계건(閔繼騫)에게 각각 시집갔다.

우의 아들은 두일(斗一)이요, 수의 아들은 두문(斗文), 두혁(斗赫), 도환(斗煥)이며, 관의 아들은 두명(斗明)이요, 실의 아들은 두극(斗極), 두형(斗衡)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여기에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새긴다.
영양 남씨 선조의 굳센 기상 이어받고,.
도산 학문의 핵심을 배웠네..
여헌 선생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지산 선생과의 우정 또한 깊었네..
이러한 공의 행적은 백세토록 길이 빛날 것이기에,.
나 이제 돌에 새겨 후손들에게 알리노라.

통정대부 전 행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한산 이돈우 삼가 짓다
通政大夫前行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
官春秋舘修撰官韓山李敦禹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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