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영양남씨 석호공파 종중
운강공 유허비는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마을 어귀 대로변에 위치해 있다.
운강공 묘역과 화지재로 들어 가는 동네 입구 근처이며, 유허비 너머 멀리 산중턱에 운강공 묘역이 보인다.
대저 선비가 세상(世上)에 태어나서 가(可)히 할만한 뜻이 있고 가(可)히 할 만한 재조(才調)를 안고서 가(可)히 할만한 때를 만나면 산(山)도 가(可)히 뛰어넘을 수 있고 바다도 가(可)히 매울 수 있으며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도 가(可)히 평화(平和)롭게 할 수 있으나, 만약(萬若) 한 걸음이라도 차질이 생겨서 마침내 그 기회(期會)를 잃는다면 의문에 북받친 감정(感情)을 떨쳐내고 마침내 임하(林下)에서 생(生)을 마치게 되면 특(特)히 같이 살던 세상(世上) 사람들이 탄식(嘆息)하며 서로 애석하게 여길 뿐 아니라 후세(後世)의 의론(議論)을 숭상(崇尙)하는 자들도 책(冊)을 덮으면서 크게 탄식(嘆息)하나니 운강선생(雲岡先生) 남공(南公)같은 분(分)이 그러하다.
공(公)의 휘(諱)는 계조(繼曺)요、자(字)는 선술(善述)이요, 운강(雲岡)은 호(號)요, 성(姓)은 남씨(南氏)니 그 영양(英陽)을 관향(貫鄕)함은 시조(始祖) 영의공(英毅公) 휘(諱) 민(敏)이 당(唐)나라 안렴사(按廉使)로 동(東)쪽 일본(日本)으로 항해(航海)하였다가 귀로에 풍랑을 만나 신라에 기착하여 영양읍(英陽邑)을 식읍(食邑)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중세(中世)에 휘(諱) 홍보(洪輔)가 계시니 고려(高麗)의 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簽議贊成事)요, 누전(累傳)하여 휘(諱) 영번(永蕃)은 중랑장(中郎將)으로 고려(高麗)의 운수(運數)가 이미 다함을 보고 숨어 살면서 스스로 편안하게 지냈으며 울진(蔚珍) 화방사(花坊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생(生)의 휘(諱)는 수(須)니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내고 용담현령(龍潭縣令)을 하였으니 호(號)는 송정(松亭)이며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이어받자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니 공(公)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손(孫)이니 무병사(武兵使)이며 호(號)는 신암(愼庵)이다.
조(祖)는 찬(贊)이니 부사과(副司果)요, 고(考)는 억령(億齡)이니 천(薦)으로 참봉(參奉)이요, 비(妃)는 창녕조씨(昌寧曺氏)니 좌의정(左議政) 익청(益淸)의 후(后) 사인응규(士人應奎)의 따님이다.
가정신축(嘉靖辛丑 1601년) 2월6일에 공(公)을 생(生)하니 뼈대가 뭇 사람들과 달랐으며 재조(才調)가 출중(出衆)하여 8세(歲)에 산(山)에 올라가서 놀때 선공(先公)께서 시(詩)를 읊으라 명하니 거침없이 대답하여 가로되,
花發三春色 꽃은 삼춘(三春)의 빛깔로 피었고
山含萬古心 산(山)은 만고(萬古)의 마음을 머금었도다.
하니 선공(先公)이 즐겨 가로되 우리 집 문종(文種)이 끊어지지 아니 하였도다 하고 크게 되기를 기대期待)하였다。
공(公)이 어려서는 가정(家庭) 안에서 교육(敎育)을 받고 커서는 도덕가(道德家)에게 학문(學問)을 배우고 연구(硏究)하여 견문(見聞)이 날로 넓어지고 실천(實踐)함이 날로 도타워졌으며, 또 문친(門親)에 비지치리(賁趾致利)가 도산선생(陶山先生)께 도(道)를 듣고 삼종(三從) 참봉(參奉) 정방(靖邦)이 용산(龍山)에 수업(受業)하여 경서(經書)를 밝히면서 후학(後學)들을 가르치니, 공(公)이 이공간(二公間)에 종유(從遊)하면서 화수(花樹)의 의(誼)와 충효(忠孝)의 절개(節介)에 더욱 힘쓰니 수월조공(水月趙公) 검(儉)과 사월조공(沙月趙公) 임(任)이 공(公)의 행실(行實)과 문학(文學)을 사모(思慕)하여 일찌기 중(重)하게 여겨 경례(敬禮)하였다。
갑인(甲寅 1614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當)하여 집상(執喪)하기를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다. 백씨공(伯氏公)이 모부인(母夫人)은 연세가 높고 병(病)이 많아 화왕산(火旺山) 의진(義陣)에 나가지 못한다고 하니 부인(夫人)께서 대의(大義)로 꾸짖었다. 공(公)이 봉모(奉母)하기로 자임(自任)하고 형(兄)에게 고(告)하여 의진(義陣)에 나가도록 하고 시(詩)를 읊어 증(贈)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精誠)을 다하여 정성(定省)하는 절차(節次)와 선반위의 차림을 혹시(或是)라도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세상(世上)이 더욱 어지러움에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청송(靑松)의 안덕(安德)에 들어가서 지산선생(芝山曺先生) 호익(好益)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交)로 끊임없이 교유(交遊)하였다.
정미(丁未 1667년)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만나 거상(居喪)하는 절차(節次)를 하나 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대로 따라 하였고, 백씨공(伯氏公)이 마침내 의진(義陣)에서 순국(殉國)하자 공(公)이 달려가서 의관(衣冠)을 사서 돌아와 부친(父親)의 묘하(墓下)에 장사(葬事)하고 날마다 성묘(省墓)하면서 늙도록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그의 우애(友愛)의 독실(篤實)함이 대개 이 같더라.
운강(雲岡)으로써 호(號)하였음은 쌍체(雙棣)가 엉켜 더부룩하니 구름의 운치(韻致)를 사양하지 아니함이요,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봄에 하늘에 구름이 나는 것 같으니 동생(同生)을 생각하며 외로이 서서 두릉(杜陵)의 구름을 본다는 뜻이 아닌가.
평생(平生)에 사물(事物)로서 마음 쓰지 아니하고 아들을 가르침에 의방(義方)으로 하고 집을 화목(和睦)으로 다스리고, 고을에 살면서 충(忠)과 신(信)으로 하니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공(公)의 행의(行誼)를 알고 극(極)히 칭찬(稱讚)하였고 관찰사(觀察使) 김공(金公) 수(睟)는 또한 천(薦)하여 통정계(通政階)에 올랐다.
천계신유(天啓辛酉 1681년) 8월23일에 돌아가셨다.
배(配)는 성산이씨(星山李氏)니 이조판서(吏曹判書) 여신(汝信)의 후(后) 사인(士人) 방준(邦俊)의 따님이니 정숙(貞淑)하고 부드럽고 순(順)하여 부인(婦人)의 덕(德)에 어그침이 없었다.
계배(繼配)는 김해김씨(金海金氏)니 사인(士人)사인(士仁)의 따님이다.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두었으니 남(男)에 우(宇)는 천참봉(薦參奉)이요, 수(窓)도 참봉(參奉)이요, 관(寬)이니 이씨 출(李氏出)이요, 실(實)은 김씨 출(金氏出)이다. (女)는 권극형(權克亨)과 민예언(閔繼騫)에께 출가(出嫁)하였다.
우(宇)의 자(子)는 두일(斗一)이요, 수(達)의 자(子)는 두문(斗文)과 두혁(斗赫) 두환(斗煥)이요, 관(寬)의 자(子)는 두명(斗明) 두찬(斗燦) 일만(日萬)이요, 실(實)의 자(子)는 두극(斗極)과 두형(斗衡)이니 나머지는 다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아! 공(公)이 영특(英特)한 자질(姿質)로 효우(孝友)하며 충근(忠謹)한 행실(行實)이 있고, 재조(才調)는 족(足)히 서무(庶務)를 경륜(經綸)할 수 있고, 문장(文章)은 족(足)히 제왕(帝王)의 곁에서 빛날 수 있었으나 깊이 수풀에 감추어져서 이미 좋은 장사터를 만나 참 보배의 가치(價値)를 인정(認定)받지 못하였고, 오직 당시(當時)의 도학군자(道學君子)에 비지선생(賁趾先生) 지산(芝山先生) 여헌(旅軒先生)과 우리 선조(先祖) 참봉공(參奉公)으로 더불어 때로 갈고 닦으며 금(金)을 끊는 것과 같이 하고 난초(蘭草)의 향(香)과 같이 하였으니 시문(詩文)의 왕복(往復)과 경사(經史)를 강(講)하고 토론(討論)함이 반드시 많이 세상(世上)에 전(傳)하여지고 상자(箱子) 속에 감추어짐이 다 병화(兵火)에 타버리고 이제 먼 뒷세상(世上)에 비록 그 영향(影響)을 찾으려고 하나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恨)이로다.
평일(平日)에 숨어 살면서 고생(苦生)하던 곳이 반귀대(盤龜臺) 위에 있었는데 세월(歲月)이 오래 됨에 황폐하여 져서 후손(後孫) 모든 분들이 공(公)의 유촉(遺躅)이 없어지고 드러나지 아니할까 저어하여 바야흐로 머리를 모아 의논(議論)할 즈음에 후손(後孫) 모모(某某)가 거금(巨金)을 독담(獨擔)하며 이에 큰 돌을 다듬으니, 일문(一門)의 노소(老少)들이 그 고의(高義)에 감격(感激)하여 복수(福洙) 해선(海善) 양씨(兩氏)가 문중(門中) 젊은 사람 형종(瀅鐘)을 이긍암선생(李肯庵先生)이 찬(撰)한 묘비문(墓碑文)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유허비문(遺墟碑文)을 청(請)하니 스스로 늙고 썩은 붓이 만만부당(萬萬不當)하나 일이 한 집안의 같은 일에 관계(關係)됨으로 드디어 그 망령(妄靈)되고 참람함을 잊고 우(右)와 같이 서술(序述)하고 이어서 위(爲)하여 명(銘)하여 가로되,
높도다! 운강공(雲岡公)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하늘에서 빼어온 그릇이로다.
대광공(大匡公)의 운치(韻致)와 풍도(風度)요, 송정공(松亭公)의 법도(法度)로다.
본 바탕이 충(忠)과 효(孝)이며 시(詩)와 예(禮)는 갓옷과 갈포옷이로다.
재목(材木)은 기둥과 들보를 감당할 수 있고 문장(文章)은 족(足)히 화려함이로다.
한 부여 된 강기(剛氣)는 쇠로 만든 간(肝)이요, 돌로 만든 자로다.
일찍 살 곳을 점지(点地)하니 송학(松鶴)의 양지(陽地)로다.
도(道)로서 명(命)을 삼고 의(義)로서 마음 집을 하였다.
깊이 감추어진 좋은 옥(玉)이요, 뛰어나지 아니한 품질(品質)은 좋은 쇠붙이로다.
넓고 넓은 우주(宇宙)에 내가 어디에 돌아갈 것인가?
지산선생(芝山先生)과 여헌선생(旅軒先生)으로 더불어 서로 마음을 허락(許諾)하면서 사귀었도다.
선조(宣祖) 임진(壬辰) 계사년(癸巳年)에 왜병(倭兵)들이 미친듯이 일어났도다.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갈라졌으며 담(膽)은 떨어지고 눈초리가 찢어졌도다.
백형(伯兄)에게 울면서 고(告)하여 화왕산(火旺山) 義陣에 나아가게 하고
어머니가 계심에 내가 모시리라고 하였다.
달아나서 깊은 산(山)에 엎드려 숨으니 마음은 붉고 털은 의도다.
발로는 실지(實地)를 밟고 손으로는 퇴폐(頹廢)한 파도(波濤)를 막으리로다.
높고 높은 운강(雲岡)이여 만 번 갈아도 마멸되지 아니 하리로다.
두릉(杜陵)에서 구름을 쳐다봄은 예나 이제나 같은 무리로다.
자애(慈愛)로운 음덕(陰德)이 이미 두터우니 후손(後孫)들이 번성(繁盛)하여 충(忠)도 하고 문장(文章)도 하고 하여 조상(祖上)의 발자취를 이을 것이로다.
물은 참아 폐(廢)하지 아니하며 땅은 차마 꺼지지 아니 하도다.
옛날 은거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시던 곳은 반귀(盤龜)의 터전이로다.
아름다운 유허(遺墟)를 밝게 함은 백척(百尺)이나 되는 비석(碑石)이로다.
앞의 정평(定評)을 닦아 명(銘)의 노래로 하오니,
뒤 세상(世上) 백세(百歲) 후(後)에 밝고 밝게 길이 드리우리로다.
도유협흡국추절(屠維脇洽國秋節))
방후손(傍後孫) 병기(炳基) 근찬(謹撰)